인물열전

인물열전] 1. 이와사키 야타로 - 일본 재벌의 상징 미츠비시, 그 창립자

PENGUIN KIM 2020. 11. 28. 20:43

가슴 왼편의 미츠비시 문장이 돋보인다.

 

 

  • 이와사키 야타로 (岩崎弥太郎)
  • 1835년(텐포 5년) 출생, 1885년(메이지 18년) 사망
  • 토사번(현재 고치 현 지역)의 하급 무사 출신
  • 미츠비시(三菱) 재벌 그룹의 창시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이름이 잘 알려진 '미츠비시 그룹'의 창시자가 바로 이와사키 야타로입니다.

잘 알려진 것은 물론 미츠비시 그룹이 전범기업집단이기 때문이죠.

 

미츠비시 그룹은 날 때부터 정부와 밀월관계였기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정부의 첨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정부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국가사업을 수주하고 다양한 분야에 사업을 확장한다는 일본식 재벌의 시초가 미츠비시 그룹입니다. 우리나라도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일본식 성장 모델을 참고하였기에 한국의 재벌집단의 초기 역사 또한 일본식 재벌과 흡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미츠비시는 어떻게 그러한 역사의 경로를 따라가게 되었을까요.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생애를 살펴봅시다.

 


정치의 변두리에서 맴돌다

 

그는 토사번의 가난한 하급무사 집안 출신입니다. 전근대세계가 으레 그렇듯 일본도 당시 강력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야타로도 가난에 시달리고 희망이 거의 없는 말단신분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출세를 위한 유학 공부를 합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너도나도 과거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러다 야타로의 아버지가 술자리에서 싸움을 벌여 투옥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야타로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아는 뇌물을 받고 사람을 감옥 보내는 데에 법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한다>고 관아 벽에 써서 그도 투옥되어버립니다. 투옥기간 동안 산술과 상법을 공부했다고 전해집니다.

 

감옥생활이 끝나자 마찬가지로 술자리에서 사람을 때려 일자리를 잃은 상급무사 요시다 토요(吉田東洋) 밑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요시다 토요는 토사번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복귀하게 되자 야타로는 그를 따라 토사번의 일을 맡았습니다.

 

토사번의 위치

토사번은 외국의 물품을 일본에 들여오는 무역업에 공을 쏟고 있었습니다. 요시다 토요는 나가사키의 무역소로 일하러 갈 때 야타로를 데리고 갔고 거기서 야타로는 해운업과 처음 인연을 맺습니다. 

 

나가사키는 일본과 서양을 이어주는 가장 오래된 창구였고 19세기에는 아주 번성했던 도시였습니다. 그 화려함에 정신을 잃었는지, 야타로는 유흥가에서 여비를 다 써버리고 토사번으로 돌아왔습니다. (NHK에 따르면 야타로의 유품에서 기생들의 사진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는데 아마 영업에 접대 및 기생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출세와 정치에 대한 미련이 남았었는지, 야타로는 토사번에 돌아와서 감옥생활을 할 때 박탈됐던 무사 신분을 사채를 끌어다가 다시 사옵니다. 요시다 토요가 암살당하고 나서 후임은 고토 슈지로(後藤象二郎)가 맡습니다. 이 고토 슈지로는 요시다 토요 밑에서 야타로와 같이 공부한 사이기도 합니다. 슈지로는 야타로에게 오사카에서 무역 및 회계 담당을 맡깁니다.

 

결국 야타로는 메이지 유신이 될 때까지도 정치에 입문하지 못하고 그 주변부만 맴돌았습니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한미한 무사집안 출신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대신 상업에 종사하기로 합니다.

 

 

 

 

 

해운업에서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다

 

미츠비시 로고의 변천

미츠비시 로고의 유래는 토사번의 영주 가문이었던 야마우치 가문의 문장(왼쪽 위)과, 야타로의 가문 문장(왼쪽 아래)을 합친 것입니다. 토사번 출신이라는 것과 사무라이 출신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로고입니다. 토사번은 메이지유신 무렵 여러 세력 간 중재역할로 유명했고 유신 이후 친정부 성향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사무라이 출신이라는 점은 정치 참여라는 의미와 연관을 가집니다. 로고가 야타로의 이후 행보를 암시하는듯 합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기존의 봉건 막부 체제가 신정부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번'이라는 지방 영주 세력은 더이상 인정되지 않고 중앙 권력에 직속된 '현' 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사번이 영위하고 있던 외교활동, 즉 독자적으로 오사카에서 외국 무기, 생활물품등을 들여오는 사업도 인정되지 않았고, 토사번이 오사카에서 운영하던 상업회사는 야타로가 물려받아 츠쿠모상회라는 이름을 거쳐 미츠비시 상회가 탄생합니다. 이처럼 유래가 지방정부 소속 회사였으므로, 더군다나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하나였던 토사번 소속이었으므로 미츠비시는 신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당시 일본의 교역량이 급증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해운업은 유망한 산업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토내해를 통한 해상 운송량 비중이 철도나 도로 등 다른 수단을 압도하는데, 야타로가 미츠비시 상회를 세웠을 무렵 세토내해 해상 운송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회사는 '일본국 우편증기선 회사'였습니다. 일본국 우편증기선 회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신정부의 투자를 받아 설립되었고 전신 회사까지 따지면 수백년의 업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츠비시 상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좁았습니다. 

 

서민친화적 전략으로 사세를 조금씩 키우고 있었던 이와사키 야타로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는데, 1874년 대만에 표류한 일본 민간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대만에 군대를 파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상업활동 이외엔 외부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폐쇄적인 분위기의 일본, 그리고 막 태어나서 기틀을 잡지 못한 신정부로서는 해외에 군사력을 처음 투사해야 하는 상황이 대단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신정부는 원정 준비에 역량을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당연히 1등 해운기업 '일본국 우편증기선 회사'에게도 문의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날 지도 모르고 전쟁이 난다면 배와 인력을 엄청나게 희생해야 하는 상황을 걱정했던 그 회사는 정부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급해진 신정부가 야타로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는데 야타로는 이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신생회사 다운 도박입니다. 야타로의 친정부 성향과도 합치되는 결정입니다. 야타로에겐 다행히도 대만원정은 별 피해없이 끝났고 그의 도박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후 미츠비시 상회는 정부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습니다. 대만원정 이듬해인 1875년에 경쟁사였던 일본국 우편증기선 회사는 해체되어 미츠비시 산하로 들어갑니다.

 

대만원정 이후 미츠비시의 성장은 놀랄만한 것이었는데, 도쿄 입성 1년만에 일본 최대 기업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사무라이 시절 쌓아둔 인맥과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정부의 사업을 대거 수주, 빠른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일본 신정부의 성장과 더불어 일본의 공업화의 한 축을 맡은 미츠비시는 전방위적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재벌이라는 개념을 탄생시키기에 이릅니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1885년 만 50세에 위암으로 타계합니다. 미츠비시 그룹의 후계자는 동생인 이와사키 야노스케가 물려받습니다.

 

 

 


 

 

 

이와사키 야타로의 초기 생애를 보면 그는 전통적 의미의 출세, 그러니까 지방정치를 넘어 중앙정치까지 입성하고자 하는 열망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상업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입신양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사무라이 시절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신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며 사업을 확장시켰고, 그렇기 때문에 재벌기업은 오히려 하급무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공방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사키 야타로의 대성공은 일본 정부와 사업가들에게 정치와 경제가 한 몸이 되어 성장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지만 일본의 재벌은 정경유착, 2차대전기 전쟁범죄라는 짙은 그림자를 남기게 됩니다.